본문 바로가기

Movies

<클레어의 카메라>(2017) - 홍상수 리뷰/해석 : 피판단자, 혹은 판단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하여

1.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 영화도 아주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68분은 사실 장편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길이입니다. 기승전결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관객에게 친절하고 효과적으로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68분은 사실 짧은 시간이니까요. 그럼에도 <클레어의 카메라>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마치 영화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다며 흡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2. <클레어의 카메라>는 비선형적인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나 <프레스티지>같은 영화처럼 관객에게 퍼즐맞추기를 요구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들어맞게 삽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처럼 보입니다. 사칙연산의 순서에 대해 처음 배운 아이가 '왜 나누기를 곱셈 다음에 해야하는 거야?'하고 순진무구하게 물어보는 것처럼요. 따라서 영화의 각 씬은 한 영화 안의 여러 씬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별개의 단편영화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배우도 동일하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같지만 내용은 다른 단편을 모아둔 옴니버스 영화같아요. 홍상수 감독의 전작인 <옥희의 영화>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처럼요. 다만 이 영화에서는 이런 여러가지 버전의 이야기들이 챕터를 통해 구분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꿰어져 있고 아슬아슬하게 덧대어져 있는 이야기들 사이를 '클레어'라는 인물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3. <클레어의 카메라>는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서 관객을 영화 안으로 던져놓고, 또 빼버립니다. 쇼트와 쇼트는 영화 말미 만희가 잘라놓은 손수건 조각들처럼 날카롭게 갈라서있습니다. 그 사이를 로딩 하듯이 메꾸고 있는 인서트 쇼트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쇼트들은 너무나 정적이라 여러 장의 사진 위로 음성이 덧입혀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클레어가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의 나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단절성과 무논리성은 시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클레어와 완수는<C'est tout>의 시 한구를 함께 읽습니다. 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완수는 아름답다며 읽는 법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클레어의 카메라>와 같은 영화가 가진 특성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 어떻고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처럼 느껴지면 어떻습니까. 그 자체를 보는(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울리고 가슴을 간지럽히는 감격이 있는데요.

4. 영화 초중반에 만희가 양혜에게 해고를 통보받을 때, 그리고 양혜와 완수가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때 주변의 음향이 그들의 말소리를 거의 잡아먹을 듯이 덮쳐옵니다. 그들이 나누는 잡기들은 별로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본심과 한참은 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의 본심은 홍상수 영화가 언제나 빠짐없이 제시하는 '술자리'에서 결국 드러나게 됩니다.

5. 영화 내에서 인물과 인물 사이에 내려지는 몇가지 판단이 돋보입니다. 양혜는 만희가 부정직하다는 판단 하에 그녀를 해고합니다. 완수는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양혜에게 사적인 이별을 고합니다. 판단을 내리는 판단자와 판단내려지는 피판단자들의 대사는 비슷합니다. 판단자들은 '이게 내 판단이다'라며 일방적인 통보를 내리고 피판단자들은 '그게 네 판단이라면 알겠다'며 순응합니다.

6. 이런 판단의 비소통성과 편향성은 우리 삶에서도 일반적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타인에 대해 제멋대로 판단을 내립니다. 종종 그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런 판단에 작은 변화가 오곤 하지만 결국 그런 판단의 변화 또한 자신이 내린 판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로부터 일방적으로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는 존재입니다. 이런 시선은 사르트르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타인을 바라봄은 결국 타인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그를 내 주체성 안에 가두는 일입니다.

7. 이런 측면에서 영화에서 강조되는 '사진'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사진은 개인을 작은 프레임 안에 고정시킵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개인은 결국 타인의 시선 속에서 바라보아지는 수동적 개인입니다. 카메라로 누군가를 담았을 때 그 사람은 결국 '찍는 사람'인 내가 원하는 맥락 하에 카메라에 담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것은 결국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영화'에도 적용되는 특성이며 더 나아가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특성입니다. 예술이란 결국 인간이 갖고 있는 각자의 시선을 담아낸 결과물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술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클레어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이야기하고, 만희와 완수를 보고 예술가처럼 느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8. 우리는 언제나 무수히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희가 클레어의 사진을 보고 양혜의 본심을 눈치챈 것처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는 타인의 시각을 예술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을 봄으로써, 영화를 봄으로써, 음악을 듣고 그림을 봄으로써 내 인생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폭격에 대한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런 엿봄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숙명을 바꾸어놓지는 못하기에, 우리는 결국 만희처럼 짐을 싸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