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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

이키루 리뷰(1952) - 구로사와 아키라 :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 '그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라는 강렬한 선언과 함께, 이 영화는 시작합니다.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 주인공을 향한 이런 선언은 충격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인류는 아마 기록에도 없던 오래 전부터 '불멸'이며 '불로장생'을 꿈꿔왔을 터입니다.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는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죽었다고 하다니요? 주인공을 보면 그는 조금 아파보일지언정 잘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영화는 이런 의문에 세차게 고개를 젓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저 생리학적으로 살아가는(이키루)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존재를 일컬어 '현존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현존재로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의 본래적 모습입니다. 따라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현존재가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직무유기이며, 스스로를 '비본래적 존재'로 떨어뜨리는 행위입니다. <이키루>는 이와 비슷하게, 매우 강하고 또 단호하게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며 <이키루>가 이런 주제를 어떻게 영화적인 화법으로 다루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1. 죽음에 대한 자각

 

- <이키루>에서 주인공 와타나베가 죽음을 깨닫는 장면은 상당히 느린 호흡으로 진행됩니다. 마치 형태 없는 죽음이 천천히 모습을 갖추며 목을 옥죄어오는 느낌입니다. 만약 이 장면에서 와타나베가 의사에게 직접 시한부 선고를 받고 충격을 받게 된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와타나베만큼이나 강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내용임에도 이 장면이 이렇게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불안'을 형상화하려고 하는 연출방식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 장면은 처음 시작부터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이미지들을 연속해서 늘어놓습니다. 어두운 복도, 고개숙인 채 앉아있는 환자들, 실려나가는 시체(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밝은 흰색으로 둘러싸여 강조된)처럼 말입니다. 이런 것은 와타나베가 느끼는 묘한 불안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면 1. 이 장면은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 이렇게 안개처럼 떠오른 불안은 다음 장면의 근경(화면에서 가장 가까운)에 등장하는 '신문을 든 남자'로 인해 형체를 찾아갑니다. 그는 원경에 있는(화면의 뒤쪽 영상면에 있는) '물 마시는 남성'을 힐긋거리며 와타나베에게 위암의 증상을 설명합니다. 그 남자가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증상을 떠올리는 듯 합니다. 와타나베가 느끼는 걱정과 불안이 커질수록, 화면에서 보여지는 와타나베의 불안한 동공도 더욱 커져갑니다.

 
 

장면 2-1~2-4.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불안감이 커져갈수록, 와타나베의 두려운 얼굴이 화면에 더욱 크게 자리해간다.

- 이제 대기실에 남겨진 와타나베는 아주 작고 무기력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들어선 진료실은 알수없는 도구들로 가득찬, 이질적이고 불안한 공간이고요. 이어서 의사는 '신문 든 남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습니다. 별 것 아닌 병인양 이야기하는 의사를 보며 와타나베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합니다. 오직 관객만이 볼 수 있는 진실된 의료진의 시선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왼쪽 위 장면 3. 더욱 무기력하고 작아보이는 와타나베 /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면 4-1~4-3 : 진료실은 알수 없는 기구로 들어차 있다. 낯설고 차가운 장비는 언제나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장면 5-1,5-2 : 의료진은 와타나베가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

- 이제 와타나베는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공포와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도로변에 서 있는 와타나베의 앞으로 시끄럽게 경적과 엔진음을 내뿜으며 지나가는 차들은 와타나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는 듯 사나운 기세를 내뿜습니다. 죽음을 마주한 와타나베의 모습은 관객에게 갈 길을 잃은 미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면 6-1, 6-2 : 와타나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는 듯 사납게 울부짖는 차량들

 

2. 홀로 남겨지다

- 구로사와 아키라는 화면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탁월한 감독입니다. 죽음을 인지한 와타나베의 절망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장치를 살펴봅시다. 그는 평생을 아들을 위해 투신해온 남자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차갑게 등을 돌리죠. 아들이 자신을 찾는 줄 알고 환하게 빛나던 그의 얼굴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세요. 이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부짖는 그의 너머로 25년 개근에 대한 표창장이 보입니다. 표창장의 각도와 화면 내에서의 높은 위치 때문에 화면 너머로 마치 저승사자가 내려다보는 것 같은 압박이 전해집니다. 영광스러워야 할 상이 이 순간은 사형선고문처럼 보입니다.

 
 

장면 7-1~7-4 시계방향으로 : 아들의 부름에 희망에 가득차 있던 그는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어둠에 갇힌다.

장면 8 - 울부짖는 와타나베를 내려다보는 표창장. 거기에는 어떤 영광도 없다.

 

3. 쾌락이 답인가?

- 와타나베는 남은 인생을 더 값지게 쓰는 법을 찾다가 술집에서 만난 작가와 쾌락으로 가득한 한밤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때 와타나베와 작가가 만나는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작가에 대한 와타나베의 심적 거리가 화면으로 표현되는 것을 봅시다. 처음에 작가가 아무것도 모를 때 그는 와타나베를 등지고 서 있지만, 대면해서 와타나베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그의 존재는 화면을 가득 채울만큼 거대해집니다. 이후에 작가가 오만하게 와타나베에게 세상의 즐거움을 알려주겠다고 할 때 그는 거의 악마처럼 온몸을 펼치고 와타나베를 내려다보죠. 이후에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언급하는 것과, 검정개가 등장한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런 악마적 연출은 의도되었다고 봅니다.

 
 

장면 9-1~9-4 아래로 : 처음에는 멀리서 등돌리고 있던 작가는 점차 화면에서 존재를 키워가다가 종래에는 와타나베를 집어삼킬듯 내려다본다.

- 하지만 와타나베가 느낀 쾌락은 자신의 존재로부터의 도피에 가깝습니다. 환락가를 배회하며 취해버린 와타나베의 모습은 거울에 비춰지거나, 철장이나 사람에 가려지거나, 번쩍이는 조명 속에서 흐려져갑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더욱 옅어져갑니다.

 

장면 10-1~2 : 거울에 비춰져있던 와타나베는 취기가 오르자 아예 거울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장면 11-1~4 : 거리에서 그는 어딘가에 가려있거나, 번쩍이는 조명에 가려지거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누군가'로 전락해버린다.

 

- 흐려져가는 존재속에서 그가 화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생은 짧아요'를 부르는 장면은 술집 내의 손님들을 동요시키는 것 만큼이나 관객을 감정적으로 동요시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관객들을 노려봤던 장면이 관객 모두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화면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샷은 캐릭터와 관객을 정서적으로 가장 강하게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장면 12 : 캐릭터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은 강렬한 감정적 동요를 준다

 

- 환락으로 가득찬 밤이 끝나고, 와타나베는 작가와 독대합니다. 작가와 와타나베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간밤에 대한 와타나베의 감상은 그의 표정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와타나베의 강렬한 눈빛과 입가에 어린 냉소가 '이게 다냐'하고 비난하는 듯 합니다. 작가는 자신있게 주점을 나서던 때와는 다르게 부끄러움에 가득차서 눈빛을 흐립니다.

 
장면 13-1~2 : 술집을 나설때와는 정반대의 포지션이 되어버린 와타나베와 작가.

 

4. 죽음 앞에서 맞이한 생일

- 환락의 밤 이후, 우연히 마주친 시청의 여직원은 그의 삶에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그녀가 얼마나 순식간에 와타나베와 거리를 좁혀오는지 보세요. 그 거리는 처음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지만, 가족이며 세상에게 버림받은 와타나베에게는 따뜻한 접근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녀는 와타나베가 일생을 바쳐온 관료제에 정확히 반대지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장면 14-1~2 : 시청의 여직원은 와타나베를 똑바로 쳐다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 와타나베는 그녀의 생기를 부러워하고, 그녀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그녀가 질릴 정도로요. 이제 그녀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장면을 위 장면과 비교해보면 명암대비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여직원은 젊은 여학생들을 부러워하는 순수한 인물인데, 와타나베가 지고 있는 짐은 너무 크니까요.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장면 15-1~2 : 윗 장면에서 명조광을 받으며 환하게 빛나던 이들은 이제 암조광 속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와타나베는 이제 그녀에게 모든 상황을 고백하고 그녀가 이렇게 생기로 가득찬 이유를 알아내고자 합니다. 부담스러워하던 여직원은 떠오르는대로 그냥 이야기하죠. "과장님도 뭔가 만들어보세요." 와타나베는 이후 일순간 무엇인가를 깨닫고 시청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카페에서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여학생들이 생일자가 도착하면서 그녀를 향해 몰려들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줍니다. 이 장면에서 시청으로 돌아가는 와타나베와 노래불러주는 여학생들 그룹의 이미지가 한 화면에 잡힙니다. 마치 여학생들이 와타나베에게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 같아요. <스토커>나 <박쥐>에서도 이런 '생일'의 상징이 사용되었었죠. 여기서의 생일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에 대한 축하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이 장면을 기점으로 와타나베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뒤바뀌어버립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정말로 태어난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알을 깼다'고 할 수 있겠네요.

장면 16 : 와타나베가 다시 태어난 것을 학생들이 축하해주는 듯 하다

 

5. 그래서 결국, 왜 '살아야 하는가'

 

- 이 영화는 이 직후에 주인공을 죽여버립니다. 놀랍게도 주인공이 '변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에 말입니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영화라면 하이라이트로서 변화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린북>같은 영화를 떠올려봅시다. 주인공 토니는 흑인을 혐오하는 사람이었지만 돈 셜리와 함께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심적 변화를 겪고, 결국 영화의 중후반부부터는 돈 셜리를 절친한 친구로 여기게 됩니다. <그린북>같은 영화는 이처럼 관객이 주인공에게 몰입함으로써 주인공이 올바른 길로 들어설 때 관객도 함께 쾌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 쾌감 속에서 관객은 무엇이 옳은지 깨닫거나, 재확인합니다. 이른바 '로드 무비'라는 것들은 대부분 그런 구성을 취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키루>는 다른 접근방식을 택합니다. 주인공의 행적을 좇으며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대신, 주인공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의 행적을 통해 그의 행적은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키루>가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아마 이런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서 <이키루>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그 비관적인 '사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 사람들이 회상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실로 대단합니다. 와타나베는 '공원 만들기'라는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오로지 그 일에만 몰두합니다. 영화 중초반부에 그려졌던 것처럼 온통 그늘진 얼굴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마치 빛을 뿜어내는 듯 하며 평온으로 가득차보입니다.

장면 17-1 : 와타나베의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다 /
 
장면 17-2 : 와타나베를 둘러싼 명암은 마치 이불처럼 포근해보인다.

- 사람들은 처음에 부시장의 (있지도 않은)공을 칭송하기 바쁘지만, 논의가 진행될 수록 와타나베의 업적에 대한 자신들의 본심을 꺼내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그처럼 살아야 한다며 결의를 하죠. 하지만 이후, 영화의 결론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견, 결국 이 모든 것이 의미없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합니다. 구청의 직원들은 여전히 일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바쁘고, 이것에 분개하는 인물조차 결국에는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서류더미 속에, 기성 체제 속에 파묻혀버립니다.

 
 
장면 18-1~3 : 카메라의 움직임이 직원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 같다. 한걸음씩, 서류더미 속으로 침잠하는 카메라.
 

 

- 하지만 직후에 등장하는 엔딩에 주목해보면, 그런 결론은 크게 뒤바뀝니다. 와타나베의 노력으로 이제 폐허는 그럴듯한 공원으로 거듭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뛰놀고 있습니다. 여전히 똑같은 모습에 분개했던 구청직원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부끄러운 듯 발걸음을 옮기지만 그에게도 여전히, 하늘만큼이나 넓은 가능성이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장면 19-1~2 : 와타나베가 남긴 것. 그것은 하늘만큼이나 넓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 <이키루>는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극적으로 개변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도 문득 깨달음을 얻고 극적으로 변한다면 그거야말로 꿈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와타나베의 '살아감'으로 인해 세상은 아주 약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와타나베의 모습은 미래의 주역이 될 아이들에게, 적어도 동료 직원 한명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진 하늘만큼이나 넓은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약간 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사르트르는 인간의 '피투성(세상에 던져짐)'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본질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슨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가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그 선택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무제한의 자유를 선고받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로 방황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표지입니다. <이키루>가 관객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표지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