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그는 그런 틀을 싫어하는 듯 하지만 어쨌든 '홍상수식 찌질이'와 '홍상수식 술자리'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서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강렬함이 담겨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음향 효과가 상당히 조야하다는 점이 아쉽게 다가옵니다.
- 그의 영화에서 숏과 숏이 부드럽게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전 작품을 통틀어봐도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디졸브(한 숏이 점차 사라지면서 다음 숏이 등장하는 기법)조차 없이 모든 숏이 깔끔하게 분절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인 방식입니다. 이안 감독의 <헐크>에서처럼 한 화면에 여러개의 숏이 한번에 담기고, 스티브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에서처럼 여러가지 숏이 유려하게 얽혀들어가는 디지털 방식과 거리가 먼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관객에게 굉장히 불친절합니다. 숏과 숏의 연결이 만들어내는 내용을 우리는 몽타주라고 부릅니다. 몽타주가 연속적인 내용을 담으면서 자연스럽게 바로 다음 이야기를 해 나갈때 우리는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인 간격이 멀리 떨어진 숏으로 이루어진 몽타주를 볼 때, 우리는 숏 사이에 있었던 일을을 상상으로 메꿔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의 몽타주는 이런 불편한 방식으로 제시됩니다. 우리는 인물들의 대사 따위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적은 정보만으로 그의 행동을 해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효섭이 갔던 모임이 어떤 모임이었는지, 그가 불편하게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누구였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럽고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하지만 이런 확실함의 부재는 한편 영화를 다양한 방향으로 굴절시킵니다. 홍상수 감독은 해석의 자유, 관객의 참여를 강조해왔습니다. 관객은 이 영화에 묵직하게 존재하는 숏 사이의 공백을 스스로의 상상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재구성된 영화는 오직 그 관객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으로 환원됩니다.
- 이 영화는 보경이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베란다로 나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기묘한 행동은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온갖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 무덤덤해지려는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홍상수는 끝자락에서조차 관객에게 여백을 건넵니다. 그동안 채워지지 않은 간격으로 남았던 숏의 말끔한 절단은 엔딩에 와서 오히려 연속성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그 이후의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것도 관객의 몫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온전히 관객만의 텍스트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꿈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보통의 영화는 꿈이나 환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확실하게 현실과 환상의 벽을 세웁니다. 하지만 홍상수는 이런 방식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의 영화에서 꿈과 현실 장면은 어떤 영화적 장치도 없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보경이 잠드는 숏 이후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보경의 장례식장면은 당황스럽습니다. 그 직후 자신의 장례식이 치뤄지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방에서 나오는 보경을 보며 남편 동우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제서야 관객은 이것이 꿈인 것을 인식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이것은 '꿈'이라는 사건을 대하는 홍상수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편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실감나는 꿈에서 깨어난 뒤 잠시 혼란을 겪는다는 것을 돌이켜봅시다. 오히려 현실과 꿈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야말로 과하게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충돌의 몽타주'이론을 살펴보면 관객은 충돌하는 몽타주를 통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냅니다. 다시 말해, A와 B가 만나 C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홍상수는 이렇게 현실과 꿈 장면을 강하게 충돌시킴으로써 관객에게 현실의 끔찍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몽타주는 이렇게 관객을 끊임없이 답답하게 합니다. 관객이 보기에 주인공 네 사람은 일부러 우물에 빠진 채로 꿀꿀대는 돼지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잘못을 해나가며, 이를 해결할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차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물 속에서 버둥거리는 것이 우물에 빠진 돼지일까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우물 속 물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 현대인은 그저 영화라는 거울을 바라보며 남의 일인 양 비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